
우리는 이제 계획이라는 개념을 예전보다 훨씬 쉽게 다룬다. 엑셀 같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덕분에 숫자는 머릿속 추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수정 가능한 대상이 됐다. 셀을 복사하고 붙여 넣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되면서, 장기 전망 역시 훨씬 그럴듯하게 보이게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숫자를 다루는 방식이 반드시 합리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닻내리기 효과, 즉 앵커링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어떤 숫자를 먼저 접하면, 이후 판단이 그 숫자를 기준점으로 삼아 움직이게 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준점이 없으면 불안해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라도 숫자 하나에 기대려는 성향이 나타난다.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인물들이 바로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베르스키다. 이들은 실험을 통해, 무작위 숫자조차도 이후 판단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회전판에 적힌 숫자를 본 뒤 특정 국가 수를 묻거나, 개인의 사회보장번호 일부를 말한 직후 전혀 무관한 수치를 추정하게 했을 때, 사람들의 답변은 처음 접한 숫자 근처로 수렴했다.
이러한 심리는 협상이나 가격 결정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거래에서 먼저 제시된 가격이 높거나 낮으면, 최종 합의 지점 역시 그 범위 안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시작점 자체가 판단의 방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에 대해 25% 관세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해당 수치가 최종 관세율로 확정될지와는 별개로, 시장과 협상 상대국에 강한 기준점을 먼저 던져놓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주요 무역 상대국에 관세 서한을 발송하며, 보복 관세에 대해서도 추가 대응 가능성을 시사했다. 동시에 미국 내 생산을 선택할 경우 관세를 면제할 수 있다는 조건도 제시했다.
이 같은 발언은 외환시장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이 다시 부각되면서, 달러-원 환율은 1380원대 초중반까지 상승했다. 이는 5월 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최근 안정 국면을 보이던 환율이 다시 변동성 구간으로 진입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옵션 시장을 보면, 환율이 단기간에 급격히 상승할 것이라는 베팅은 아직 제한적인 모습이다. JP모건 역시 최근 달러-원 하락 포지션의 일부를 정리했다고 밝혔지만, 중장기적인 방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 관점은 자연스럽게 한국 주식시장으로 이동한다. 환율 상승 국면에서 해외 자본은 어떻게 움직일까. 기본 원리는 단순하다. 원화 약세는 달러 기준 수익률을 높여주기 때문에, 이미 한국 시장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환차익이라는 완충 장치가 생긴다.
예를 들어 환율이 1390원 수준에서 원화로 전환해 투자한 자금이, 이후 1320원대까지 환율 하락을 경험했다면 별도의 주가 상승 없이도 환차익이 발생한다. 이 상태에서 환율이 다시 상승하면, 투자자는 심리적으로 한층 여유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단기적인 환율 변동만을 이유로 급하게 자금을 회수하기보다는, 여전히 저평가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종목을 선별해 포지션을 유지하거나 조정하는 전략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관심을 보이는 종목이나 특정 테마에 속한 종목들은, 환율 변동 국면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급을 받을 수 있다.
결국 트럼프의 관세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메시지를 넘어, 시장에 하나의 숫자와 기준점을 던진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 숫자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지 여부와는 별개로, 환율과 자본 흐름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은 이미 작동하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개별 뉴스보다 환율 흐름과 글로벌 자금의 움직임을 차분하게 관찰하는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